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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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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와이의 난은 6세기 초, 야마토 조정의 한반도 지원을 막기 위해 큐슈 북부의 총독 이와이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일으킨 반란이다. 배경은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진출과 규슈 지방의 부담 증가였으며, 일본 학계에서는 야마토 왕권의 완전한 지배를 받지 않던 북부 규슈 세력의 반발로 보기도 한다. 이와이는 신라와 연합하여 야마토 조정의 군사 지원을 막았으나, 528년 모노노베노 아라카비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와이는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고대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반란인지 전쟁인지에 대한 논쟁과 함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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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이와이의 난
부분 분쟁고훈 시대
위치규슈 북부, 일본
좌표위도 33° 23′ 47″ N, 경도 130° 33′ 20″ E
날짜527년-528년
결과야마토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야마토 왕국
교전 2규슈 반란군, 신라 동맹군
지휘관 및 지도자
야마토 왕국모노노베노 아라카비
반란군이와이
전력
야마토 왕국알 수 없음
반란군알 수 없음
피해 규모
야마토 왕국경미
반란군심각
추가 정보

2. 배경

고훈 시대 중기 야마토 왕권은 대외적으로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것처럼 신라를 침공했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거듭 공격했다.[5] 6세기 초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일본의 한반도 내 동맹국들이 위협받았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단양이 등의 학자를 야마토에 파견해 지원을 요청했고, 야마토국은 가야 등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러한 한반도 출병으로 인한 군사적, 경제적 부담이 규슈 북부에 가중되어 이와이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규슈 북부 세력이 야마토 왕권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고 본다. 이는 게이타이 천황 즉위 과정의 논란과도 관련이 있다고 추측된다.[6]

2. 1. 일본 국내 정세

고훈 시대 중기, 야마토 왕권은 세력을 넓혀 호족들을 국조로 편입시키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것처럼 일본은 신라를 침공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거듭 공격했다.[5] 6세기 초, 신라가 강성해지자 일본의 한반도 내 동맹국들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단양이 등 유학자를 야마토에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러한 한반도 출병으로 인한 군사적, 경제적 부담이 북부 규슈에 가중된 것을 이와이의 난의 계기로 보며, 북부 규슈 세력이 야마토 왕권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이는 게이타이 천황의 즉위 과정과 관련된 논란과도 관련이 있다고 추측된다.[6]

구마소 지역이었던 쓰쿠시 지방(북부 규슈)의 총독 이와이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야마토 왕국의 한반도 지원을 막으려 했다. 이는 일본 천황가에 대한 최초로 기록된 반란이었다. 모노노베노 아라카비가 이끄는 군대가 파견되어 이와이를 토벌하고 처형했으며, 이후 다자이후 요새가 설치되면서 규슈 지역은 자치권을 잃고 야마토 왕권의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1950년대 전반, 하야시야 신자부로 등은 이와이의 난을 야마토 조정의 한반도 출병으로 규슈 지방에 부담이 가중되어 발생한 불만이 구체화된 것으로 보았다.

1960년대에는 사카모토 타로 등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와이의 난은 윤색된 것이며 실제로는 『고지키』에 기록된 정도의 작은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와이의 난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후 연구를 통해 이와이의 난은 고대사의 중요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중반, 키토 키요아키 등은 게이타이 천황 시기 전후로 국가 형성이 진전되어 야마토 조정이 각 지역 세력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이와이의 난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즉, 이와이가 독자적인 지역 국가를 확립하려 하자 국토 통일을 꾀하는 야마토 왕권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1978년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착명철검의 발견으로 통일 정권 형성 시기가 5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서 이와이의 난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야마토 조정과 백제의 연합에 대해 이와이가 신라와의 연합을 통해 자립을 도모했다는 의견, 게이타이 왕조의 동요를 보여준다는 의견, 게이타이 왕조에 의한 지방 지배 강화를 보여준다는 의견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2. 2. 한반도 정세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일본이 신라를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야마토 조정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거듭 침공하였는데,[5] 이는 신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한 6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시기에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513년에는 야마토에 단양이 등 학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야마토국은 가야 등을 돕고자 군대를 파견했다.[6]

야마토 왕권은 366년,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로 분열되어 있던 한반도를 침략했다. 일본군은 391년과 404년, 여러 차례에 걸쳐 백제 왕국의 동맹국으로서 한반도를 침략하여 신라와 고구려와 싸웠다. 6세기 초, 급부상한 신라 왕국이 일본의 한반도 내 동맹국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의 양면 공격을 받아, 513명의 유학자를 야마토에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1978년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착명철검의 발견으로, 야마토 조정과 백제 사이에 성립된 연합에 대해, 이와이가 신라와의 연합을 통해 자립을 도모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3. 전개

527년 (게이타이 천황 21년) 6월 3일, 야마토 조정의 오미노 케노는 6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에 빼앗긴 남가라, 흑기돈을 회복하기 위해 임나로 향했다. 이 계획을 알게 된 신라는 지쿠시(규슈 지방 북부)의 지쿠시 국조인 이와이에게 뇌물을 주고, 야마토 조정 군의 방해를 요청했다.

이와이는 거병하여 불의 나라(히젠 국・히고 국)와 풍의 나라(부젠 국・분고 국)를 제압하는 동시에, 왜국과 한반도를 잇는 해로를 봉쇄하여 한반도 제국으로부터의 조공선을 유인하고, 오미노 케노 군의 진군을 막고 교전했다. 이때 이와이는 오미노 케노에게 "너와 나는 같은 밥을 먹은 사이이다. 너 따위의 지시에는 따르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야마토 조정에서는 평정군 파견에 대해 협의했고, 게이타이 천황이 오토모노 오무라지 카네무라・모노노베 오무라지 아라카히・코세 대신 오토코에게 장군의 인선을 자문하자, 모노노베 아라카히가 추천되어 같은 해 8월 1일, 아라카히가 장군으로 임명되어 천황으로부터 지쿠시 이서의 통치를 위임받았다.

528년 11월 11일, 이와이 군과 아라카히가 이끄는 야마토 조정 군이 지쿠시 미이 군(현 후쿠오카현 오고리시・미이 군 부근)에서 교전하여 격렬한 전투 끝에 이와이 군은 패배했다.

『일본 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이와이는 모노노베노 아라카비가 이끄는 야마토 조정군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이와이는 모노노베 아라카히에게 참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서는 물부아라카(物部荒甲之大連)과 오토모노 카네무라(大伴金村連) 두 사람이 이와이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지쿠고 국 풍토기(筑後国風土記)』일문(逸文)에는 이와이가 부젠국 가미쓰쿠스현으로 도망쳐 남산(南山)의 험준한 봉우리에서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관군은 이와이를 뒤쫓았지만 찾지 못했고, 분노한 병사들이 석인(石人)의 손과 석마(石馬)의 머리를 쳐서 부러뜨렸다고 한다.

3. 1. 신라와의 관계

일본서기 등 사료에서는 쓰쿠시국신라와 교류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구루메시에서 발굴된 신라 토기 등 고고학적 증거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학계에서는 신라와 이와이 사이에 모종의 유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5] 일본서기에 따르면, 527년 (게이타이 천황 21년) 6월 3일 야마토 조정의 오미노 케노가 6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임나로 향하자, 신라는 지쿠시 (규슈 지방 북부)의 이와이에게 뇌물을 주고 야마토 조정 군을 막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3. 2. 야마토 조정의 대응

모노노베노 아라카비가 이끈 야마토 조정군은 528년 11월 11일 지쿠시 미이 군(현 후쿠오카현 오고리시·미이 군 부근)에서 이와이 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와이는 모노노베 아라카히에게 참수되었다고 한다.[5] 이와이의 아들 지쿠시 쿠즈코는 카스야 (현 후쿠오카현 카스야 군 부근)의 둔전을 야마토 조정에 바쳐 목숨을 구했다.

이와이의 난 진압으로 야마토 조정은 규슈 지역 지배권을 강화했고[6], 다자이후 요새를 설치하여 규슈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이와이의 세력은 영산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전방후원분을 세웠다는 학설도 있다.[7]

4. 기록

이와이의 난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고사기》, 《후쿠오카현 풍토기》 등에 남아있다.


  • 《일본서기》에는 난의 경과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527년 (게이타이 천황 21년) 6월 3일, 야마토 조정의 오미노 케노가 6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나로 향했으나, 신라의 사주를 받은 이와이가 반란을 일으켜 진군을 막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8]
  • 《고사기》에는 이와이가 천황의 명을 따르지 않아 모노노베노 아라카히와 오토모노 카네무라가 파견되어 이와이를 죽였다는 간략한 기록이 있다.
  • 《후쿠오카현 풍토기》에는 이와이의 무덤에 대한 전승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이가 생전에 미리 무덤을 만들었으며, 관군에게 패배한 후 부젠국 가미쓰미케현(上膳縣)으로 도망쳐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


국조본기》에는 이와이의 난과 신라의 관계를 시사하는 기술이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국 측 사료에는 이와이의 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4. 1. 일본 측 기록

527년 (게이타이 천황 21년) 6월 3일, 야마토 조정의 오미노 케노는 6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에 빼앗긴 남가라, 흑기돈을 회복하기 위해 임나로 향했다(모두 한반도 남부의 여러 국가). 이 계획을 알게 된 신라는 지쿠시(규슈 지방 북부)의 지쿠시 국조인 이와이에게 뇌물을 주고, 야마토 조정 군의 방해를 요청했다.[8]

이와이는 거병하여 불의 나라(히젠 국・히고 국)와 풍의 나라(부젠 국・분고 국)를 제압하는 동시에, 왜국과 한반도를 잇는 해로를 봉쇄하여 한반도 제국으로부터의 조공선을 유인하고, 오미노 케노 군의 진군을 막고 교전했다. 이때 이와이는 오미노 케노에게 "너와 나는 같은 밥을 먹은 사이이다. 너 따위의 지시에는 따르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8] 야마토 조정에서는 평정군의 파견에 대해 협의했고, 게이타이 천황이 오토모노 오무라지 카네무라・모노노베 오무라지 아라카히・코세 대신 오토코에게 장군의 인선을 자문하자, 모노노베 아라카히가 추천되어 같은 해 8월 1일, 아라카히가 장군으로 임명되어 천황으로부터 지쿠시 이서의 통치를 위임받았다.[8]

528년 11월 11일, 이와이 군과 대장군인 아라카히가 이끄는 야마토 조정 군이 지쿠시 미이 군(현 후쿠오카현 오고리시・미이 군 부근)에서 교전하여 격렬한 전투 끝에 이와이 군은 패배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이와이는 모노노베 아라카히에게 참수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이와이의 아들인 지쿠시 쿠즈코는 연좌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스야 (현 후쿠오카현 카스야 군 부근)의 둔전을 야마토 조정에 헌상하여 사형을 면했다.

난 후의 529년 3월, 야마토 조정(왜국)은 다시 오미노 케노를 임나의 안라로 파견하여 신라와의 영토 교섭을 하게 했다.

此之御世일본어 쓰쿠시군 이와이가 천황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그래서 물부황갑지대련과 대반지금촌련 두 사람을 보내 이와이를 죽였다.

雄大迹天皇일본어(게이타이 천황) 시대에, 지쿠시군 이와이는 강하고 포악하여 황풍(皇風)을 따르지 않았다. 살아있을 때 미리 이 무덤을 만들었다. 갑자기 관군이 동원되어 덮치려 하자, 세(勢)를 보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혼자 부젠국 가미쓰쿠스현으로 도망쳐, 남산(南山)의 험준한 봉우리의 굽이에서 죽었다. 이에 관군은 뒤쫓아 찾아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병사들의 분노가 멈추지 않아, 석인(石人)의 손을 쳐서 부러뜨리고, 석마(石馬)의 머리를 쳐 떨어뜨렸다.

국조본기』에는 이와이의 난과 신라의 관계를 시사하는 기술이 있다.

4. 2. 한국 측 기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국 측 사료에는 이와이의 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5. 해석 및 논쟁

1950년대 전반, 하야시야 신자부로, 후지마 우부히로, 카도와키 테이지 등은 이와이의 난을 야마토 조정의 한반도 출병으로 규슈 지방에 부담이 가중되면서 발생한 불만이 구체화된 것으로 보았다.

1960년대에는 사카모토 타로, 미시나 아키히데 등이 『일본서기』의 기록은 윤색되었으며, 실제로는 『고지키』에 기록된 정도의 작은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와이의 난이 갖는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후 연구를 통해 고대사의 중요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 중반, 키토 키요아키, 야마오 사치히사, 요시다 아키라 등은 이와이의 난을 야마토 조정이 각 지역 정치 세력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았다. 이와이가 독자적인 지역 국가를 확립하려 하자, 국토 통일을 꾀하는 야마토 왕권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1978년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금착명철검이 발견되면서, 중앙 정권 형성 시기를 5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논의가 유력해졌다. 이에 따라 이와이의 난은 한반도와의 관계, 게이타이 왕조와의 관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5. 1. '반란'인가, '전쟁'인가?

일본서기의 관점에서는 이와이의 난을 야마토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규정한다. 이와이가 지쿠시 국조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토 정권 하에서 지방 통치를 맡은 것이 국조인데, 그 지위에 있는 이와이가 신라와 손을 잡고 야마토 정권에 반항했으니 반란이라는 것이다.[3]

하지만, 국조 제도의 성립 시기에 따라 이와이를 독립적인 세력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최근에는 국조 제도가 7세기 전반에 정비되었다는 설이 제기되는데, 이에 따르면 이와이는 6세기 전반에는 국조가 아니라 규슈 북부를 거점으로 한 지방 호족이 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는 "지쿠시 국조 이와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지키, 지쿠고 국 풍토기는 "지쿠시군 이와이"로 기록하여 야마토 정권에 종속된 국조가 아니라 독립된 지방 호족으로 보고 있다.[3]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로 가는 길목인 규슈 북부를 중요하게 여겼고, 이 지역 호족들과의 우호 관계는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우호 관계가 이와이와 야마토 정권의 실체였다면, 이와이가 야마토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손을 잡은 것은 기나이와 규슈의 씨족이 각각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전쟁이지, 단순한 반란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3]

5. 2. 이와이의 난의 역사적 의의

이와이의 난은 고대 일본의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이와이 세력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970년대 중반, 야마오 사치히사, 요시다 아키라 등은 이와이의 난을 야마토 조정이 각 지역의 정치 세력을 병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았다. 즉, 이와이가 독자적인 지역 국가를 확립하려 하자, 국토 통일을 꾀하는 야마토 왕권과의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1978년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착명철검의 발견으로, 통일적인 중앙 정권의 형성 시기를 5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논의가 유력해졌다. 이에 따라 이와이의 난의 의의와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학계에서는 이와이의 난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 야마토 조정·백제 연합에 맞서 이와이가 신라와의 연합을 통해 자립을 도모했다는 견해[3]
  • 게이타이 왕조의 동요를 보여준다는 견해
  • 게이타이 왕조에 의한 지방 지배 강화로 보는 견해


이와이의 난이 단순한 "반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본서기는 이와이를 지쿠시 국조로 기록하며 야마토 정권에 대한 반란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고지키나 지쿠고 국 풍토기는 이와이를 독립적인 지방 호족인 "지쿠시군 이와이"로 기록하고 있다.[3]

6. 이와이의 난을 다룬 작품


  • 2020년 4월 22일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NHK BS 프리미엄에서 방영된 역사 프로그램 영웅들의 선택 〈스카우트된 대왕 ~지방 출신! 게이타이 천황의 실상~〉편에서 이소다 미치후미 등이 출연하여 이와이의 난을 다루었다.[1]

  • 2013년 일본 우정 연하 기부금의 지원을 받아 NPO 법인 과학영상관에서 이와이의 난을 다룬 애니메이션 〈지쿠시의 이와이〉가 제작되었다. 이와이 측의 시각에서 난의 경위를 그리고 있다.[2]


제목지쿠시의 이와이[2]
시간30분 (컬러)[2]
제작전국 농촌 영화 협회, (주)이지 필름[2]
협력(주)프로덕션 바오밥[2]
기획후쿠오카현 야메시[2]
감수후쿠오카현 야메시 교육위원회[2]
출연
스태프


참조

[1] 서적 Early samurai ad 200-1500 https://www.worldcat[...] Osprey Pub 2014
[2] 서적 Early samurai ad 200-1500 https://www.worldcat[...] Osprey Pub 2014
[3] 서적 最新古代史論 まほろばの国 ヤマトのあけぼの (歴史群像シリーズ) 学研 2009-04-01
[4] 서적 古代最大の內戰、岩井の亂 1985
[5] 서적 Early samurai ad 200-1500 https://www.worldcat[...] Osprey Pub 2014
[6] 간행물 6세기 초 筑紫國 이와이[磐井]의 난과 신라 https://www.dbpia.co[...] 2012-08
[7] 서적 전라도 천년사 전북연구원 2022-12-30
[8] 웹사이트 http://contents.nah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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